돌봄을 키워드로 ‘질병’을 다룬 책 두 권을 읽는다

돌봄을 키워드로 ‘질병’을 다룬 책 두 권을 읽는다

/돌봄을 키워드로 ‘질병’을 다룬 책 두 권을 읽는다

돌봄을 키워드로 ‘질병’을 다룬 책 두권을 읽는다.

문현아 연구원은 국제이주와 포용사회센터 책임연구원입니다.


두 책의 공통점은 저자들이 유방암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 공통점을 제외하면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한 사람은 생존해 있고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났다는 점을 먼저 언급할 수 있다. 두 책 모두 가볍게 읽기에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돌봄은 사실 ‘부담스러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행위이자 마음쓰기라는 면에서 돌봄에 대해 한번 더 고민하게 하는 책들이기도 하다.

이 이외에도 두 책은 여러 측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을 보인다. 먼저 글의 스타일이나 접근하는 관점도 상당히 다르다. 한 책은 시인이자 에세이스트가 본인의 경험을 책의 제목과 관련된 다양한 키워드와 엮어내 서술한 단독 저서다. 다른 한 책은 일본철학사 전공자와 인류학자의 편지글 대담형식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공동 저서다. 한 책은 서양 고전부터 영미권 문학과  페미니즘 서사를 통해 저자의 고통, 취약성, 필멸성, 의학, 소진, 돌봄을 통과하며 ‘언다잉(undying)’ 하고 있는 삶의 여러 측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른 한 책은 철학자로서 죽음에 직면한 본인과 그를 함께 지켜보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또 다른 존재의 고뇌와 성찰을 편지로 풀어 나가고 있다. 이처럼 두 책은 상당히 결이 다르지만, 질병과 돌봄을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책을 나란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두 책 모두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한 명의 인간이 개인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깨닫게 되는 삶의 다양한 결에 대한 귀한 성찰을 깊이 담아내고 있다. 단순한 투병기, 이를테면 앤 보이어가 강조하듯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를 통해 살아남은 ‘생존기’여야 한다”([1]-19)는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책들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살아남은 기쁨이나 살아나야 한다는 당위를 다루지 않는다. 삶과 질병이 조우하는 속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갑자기 아플 가능성’이 있다”([2]-25)는 점을 전제한다. “지금 병들지 않은 모든 사람은 예전에 병들었던 적이 있거나 머지않아 병들게 될 것이다.”([1]-293). 그래서 이 책들은 저자들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지만, 오늘을 살고 있으며 별다른 질병 없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두 책이 알려주듯 암에 걸리더라도 ‘낫는다’와 ‘낫지 않는다’는 이분법 중 단 하나의 선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은 “암이 낫지 않아도 다양한 삶을 살 수 있”([2]-49)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완치’와 ‘병중’이라는 이분화된 상태 중 어느 한쪽에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사이 어느 즈음에서 각자가 놓인 상황에 맞추어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돌봄의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의료와 돌봄의 연결

한국을 비롯한 지금 이 세상 곳곳에서 돌봄은 아직 전문화된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돌봄은 사회적으로 온당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한 채 비전문가들이 일상에서 별다른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로 간주된다. 질병 초기에 반드시 조우하게 되는 의료진의 진단과 치료가 폭넓은 의미에서 돌봄으로 포함되는 길은 아직은 닫혀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연결을 고민한다. “대기실은 돌봄노동과 데이터노동이 만나는 장소다”([1]-67), “이들은 그런 일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나를 돌보아야 한다.”  이들의 치료와 어쩌면 생사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진료의 공간은 “부단히 인간 존재를 유지시켜 주는 노동 현장이다”([1]-70-71). 이 구절을 읽으면 의료가 진행되는 공간에서 소위 환자라는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돌봄’을 기대하게 되는 맥락이 이해된다. 더 나아가 돌봄은 어떤 구체적 행위이기에 앞서 누구를 돌보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관계에 구조화되어 있는 것임도 깨닫게 된다. “결정에 지친 환자를 대신하여 의사가 대략적인 방향을 결정해줄 것, 그리고 설사 의사의 결정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의사 혼자 책임지지 않게 할 것, 이런 일들이 가능한 구조”([2]-70-71)의 필요성이 언급되어 있다.

책 속의 이런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지만 특히 환자로 명명되면서 본인의 취약성(?)을 새삼스럽게 또는 극적으로 절감하는 시점에는 의료진, 의료기관의 돌봄이 취약성을 버틸 지지대나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인들이 의료기관과 의료진으로부터 돌봄을 기대하지 않는, 기대하지 못하는 것이 이미 일종의 ‘상식’처럼 자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간호사나 간병인이나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는 ‘돌봄’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하지 않지만, 의사 ‘선생님’들 혹은 의료체계로부터는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몸이 늘 이윤의 궤도를 선회해야 하는 자본주의 의료계에서는 양측 유방 절제술마저도 외래 수술로 처리된다. 유방 절제술이 끝난 후 나는 회복 중이던 병상에서 공격적이고도 다급한 방식으로 쫓겨났다. […] 외래 수술센터에서 쫓겨나면 그때부턴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니까 나를 돌봐줄 사람이 있기는 한지, 돌봐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희생을 해야 하는지,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지원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170-171).  의료는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는 필수 서비스이며, 모두가 큰 틀에서 의료적 돌봄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함에도 지금의 세상에서는 돌봄과 의료가 잘 연결되지 않고 있다. 현실에서는 병원과 ‘영리’나 이윤추구라는 개념이 맞물리고, 코로나19시대 백신 생산에서 드러난 거대 제약회사의 독점과 배타성처럼 이윤추구만이 ‘치료’의 중요축에 놓이고 사람을 돌보는 의료는 아득하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들은 그런 의료적 현실이 고통을 가중하는 것과 연결된 지점을 언급한다.

의료는 돈과 연결되고, 다시 또 자본과 연결되는 고리 속에는 지금 세상의 중요한 ‘가치’이지만 돈이나 임금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돌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환자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큰 도움이 되는 소위 전문적인 의료의 영역에서부터 돌봄을 기대할 수 있다면 아프더라도 덜 힘들 수 있지 않을까? 돌봄은 비의료적 영역에만 남아 있어도 좋은 것일까? 이 책들은 이런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돌봄과 관계성

두 저자 모두 글쓰기를 해야만 했던 이유를 이렇게 적는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나를 되찾고, 계속 나로 있기 위해 글을”([2]-201) 썼고, “결국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상실이라는 조건인 듯 하다. 나는 모든 상실을 글로 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1]-296)라고.

‘글쓰기’라는 것 자체를 어려운 과제로 여기는 나로서는 이들의 투병 과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보통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어렵고 힘든 글쓰기가 이들에게 버티는 힘이 될 정도로, 질병으로 인해 이들이 겪은 통증이 힘겨웠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버티게 한 이들의 글쓰기 과정에는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저자들과 함께 그 과정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었다. “돌봄 문제에 대처한 우리의 해결책은 미흡한 임시 방편이었기에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내가 그 시기를 견뎌 낼 수 있게 해 주었다.”([1]-302). 저자들 곁에는 ‘우리’가 있었다. 물론 이 저자들이 고통을 겪던 바로 그 순간에는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가 그 시공간에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나와 다른 독자들은 저자들을 만날 것이고, 깊은 인연을 맺을 것이며, 책을 덮으며 짧은 안녕을 고하고 잠시 헤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이지만 서로 책을 매개로 연결되어 교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란, 본래 시작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나와 타인과 만나 운동을 일으키는 와중에 ‘나’라는 존재가 성립됩니다. 그 만남을 받아들이는 동안에 비로소 ‘나’가 존재합니다.”([2]-253).

“하지만 세상이 박탈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니다. 암은 완강했지만 내게는 그 완강함을 누그러뜨릴 창의적인 형태의 사랑이, 파트너나 가족으로 묶이지 않아 전적으로 법의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비공식적인 유형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랑이 있었다.”([1]-302)

나와 타인의 존재.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임을 느낄 때 우리는 존재하며 우리는 그렇게 순간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지. 코로나19가 끝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하는 이 시점에 아픔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와 순간순간의 치유에 귀기울여보고 싶은 분들이 이 책을 펼쳐 보길 권하고 싶은 마음으로 적어 본다.


[1] 엘보이어. 2021. <언다잉>.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2021.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