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CTMS
언론과 CTMS
'이주 여성들 위한 민간 대사관' 한국이주여성센터 20돌…이주 여성들에겐 '집'이 됐다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경상북도 문경시는 지난 4월 '인구 증가를 위한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추진 협조문'을 법무부 출입국 대행 기관인 행정사 합동 사무소에 보냈다. 혼인적령기를 놓친 '농촌 총각'과 베트남 유학생의 국제결혼을 통해 인구를 증가시키겠다는 취지였다. 협조문 안에는 맞선·교제 지원책과 함께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이주 여성의 성 상품화, 출산 도구화 등 문제가 대두됐지만, 지금도 지자체 30여 곳은 '농촌 총각 장가 보내기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을 장려했다. 2005년에는 3만여 쌍이 국제결혼으로 부부가 돼 최고점을 찍기도 했다. 이후 국제결혼의 인권침해와 불법 중개 행위의 부작용 등이 알려지면서 점차 감소 추세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매년 1만 명이 넘는 이주 여성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결혼 이주 여성은 31만 5175명에 달한다(2021년 9월 기준).
한국염 목사가 설립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이여인터)는 가정 폭력,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 여성을 보호하고, 개인 지원부터 입법 운동까지 도맡았던 유일한 이주 여성 기관이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등의 국제결혼 중개 업소 광고 문구를 고발하고, 결혼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실을 열었다. 특히 2007년에는 남편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결혼 이주 여성들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폭력 피해 여성들의 현실을 알렸다. 이 같은 노력은 이주 여성 긴급 전화 '다누리콜' 개설, 가정폭력방지법에 '외국인'을 포함하는 법 개선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허오영숙 대표는 이여인터의 2대 대표다. 2017년 대표직을 맡은 그는 이여인터와 이주 여성 인권 운동 역사를 함께해 온 14년 차 활동가이기도 하다. 20대 시절, 지역 여성 단체에서 10년 정도 활동하던 허오 대표는 NGO 연수차 방문한 필리핀에서 한국에 파견됐던 현지 노동운동가를 만나 이주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까지 '남성'으로 대표되고 있던 한국 이주민 운동 판에서, 여성운동을 해 왔던 허오 대표는 이주와 젠더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이여인터에 오게 됐다.
이여인터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이여인터는 2000년 10월 준비 모임으로 시작해 이듬해 한국 최초의 이주 여성 쉼터 '여성노동자의집'으로 문을 열었다. 2005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로 이름을 변경한 후, 이주 여성 쉼터 6개와 이주 여성 상담소 1개를 운영하고 있다.
10월 20일 오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실은 선주민·이주민 활동가들의 2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곳곳에 놓인 책장에는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의 기나긴 역사를 보여 주듯, 센터가 발간한 책자·단행본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20년을 걸어온 이여인터는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 여성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은 어떻게 흘러왔고, 어디로 가야 할까. 센터에서 만난 허오영숙 대표에게 한국 사회에서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의 의미와 과제를 들을 수 있었다. 허오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실에서 허오영숙 대표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20돌을 맞았다. 이주 여성운동을 해 오면서 체감하는 성과가 있나.
변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 같다. 일례로, 이여인터는 2016년부터 농업 분야 이주 여성 노동자 성폭력 실태를 조사하고, 이주민 주거권 개선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런데 그 후로 5년이 지난 2020년에도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가 사망했다. 한국 사회는 차별이나 폭력이 깔때기처럼 약자들에게 모이는 곳이고, 그런 것들이 이주민들한테 돌아가고 있다고 본다.
한편, 다른 부분은 잘 안 바뀌는데 한국 남성의 혈통과 관련된 문제는 빨리 바뀐다. 물론 우리가 동의하는 방식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한국인이 포함된 다문화 가정 정책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외국인끼리 결혼한 가족이라든지, 다양한 가족 형태나 이주민 문제 전반으로 넓혀지지는 않는다.
- 한 해에 얼마나 많은 이주 여성들이 이여인터를 이용하나.
이여인터 소속 서울 이주 여성 상담 센터에는 1년에 1만 건 정도 상담이 이뤄진다. 6개 쉼터에서는 모두 100명 내외의 인원이 입소해 있다. 수치로 통계를 내는 것은 상담소와 쉼터뿐이지만,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직접 지원 사업도 있다. 이를테면, 코로나19 방역·지원에서 많은 외국인이 배제되지 않았나. 이주민 밀착 접촉자나 확진자에게 생필품을 지원하거나, 민간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 센터가 지원하는 대상은 주로 이주민 여성인가.
이주 여성이 첫 번째 우선순위다. 가족 단위 내에서의 여성보다는 여성 개인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가족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더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예를 들면 '다문화 가족·자녀 프로그램'이 아닌, 양육하는 여성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센터 소개 글을 보면, '이주 여성들을 위한 민간 대사관'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사관은 해외에 있는 자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이주 여성은 제도적·사회적 한계로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할 때가 있다. 이여인터는 민간에서 이주 여성들에게 대사관과 같은 곳이다. 타국에 사는 이주 여성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편들고, 기댈 만한 곳이 되겠다는 의미다. 실제 센터에서 만나는 이주 여성들에게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주 여성들이 "(이여인터는) 우리 집 같은 곳 아니야?"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한다.
- 정부나 공공 기관이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지자체 곳곳에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나 여성가족부 소속 이주 여성 쉼터가 생겼지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여인터는 이주 여성 쉼터를 처음으로 만들고, 폭력 피해 여성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다 보니 쉼터에 온 여성들이 폭력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보게 됐다. 쉼터에 있는 동안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지만, 생활비를 지원하거나 국내 체류 기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주 여성들에게는 선주민 여성들이 가진 네트워크나, 자녀 돌봄 등 어려움을 같이할 친정도 없다. 결국 자립할 자원이 없는 이주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쉼터에서 퇴소해 자립을 원하는 이주 여성들을 대상으로 가전제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2019년부터는 여성가족부에서 이주 여성 쉼터 퇴소 여성들에게 자립 지원금(임대 보증금)을 지원했다. 한국어 교실이나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 운영도 마찬가지다. 이주 여성 단체들이 먼저 시작해 성과가 인정되면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정부도 나서서 관련 사업을 시행하는 식이다.
허오영숙 대표는 이주 여성들을 향한 차별이 국가 간 경제 격차에서 오는 왜곡된 우월 의식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이주 여성을 향한 폭력은 왜 발생한다고 보는가.
이주 여성은 기본적으로 인종, 출신 지역, 성별 등으로 인한 '복합 차별' 상태에 놓여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더해 국가 간 경제적 격차에서 발생하는 편견이 작동하는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이주 목적국'이라는 위치를 갖는다고 해서, 마치 개인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다. 결혼 이주 여성의 경우, 이러한 '한국 우월주의' 속에서 중개업을 통한 속성 결혼과 남성이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가 맞물려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결혼 이주 여성 개인 입장에서 보면 현지에서도 가난하고 한국에서도 가난한 경우가 많다.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남성이 결혼하는 것을 두고, 단지 나라가 부자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주 여성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식의 인식은, 서구는 선망하면서 아시아 저개발 국가는 차별하는 한국의 '식민지성'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 한편으로는 이주 여성을 피해자로만 보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물론이다. 한국 사회에 잘 안착한 결혼 이주 여성도 있고, 모든 이주 여성이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소수자는 일반화되기 쉽다.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 폭력을 당했다고 해도, 모든 한국 여성들이 다 맞고 산다고 일반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주 여성의 폭력 경험에 있어서는, 모든 이주 여성이 불쌍하다는 시각으로 바로 연결된다. 사례를 개별적으로 봐야 하는데 집단화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가깝다고 본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주 여성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센터의 한 축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귀환 이주 여성'
"한국인 남성 중심 체류 정책 문제적"
이여인터는 최근 귀환 결혼 이주 여성을 인터뷰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오월의봄)를 출간했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지만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등 자발적·비자발적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 대한 별도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귀환 여성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귀국하는지, 귀국 뒤에는 어떻게 본국 사회에 재통합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결혼 이주 여성이 한국 땅을 떠나는 순간,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잊히는 것이다.
"나답 씨가 미등록자 신분으로 단속에 걸린 것은 그녀가 외국인 등록이 돼 있지 않은 데다가 가출 신고까지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해서 한국에 입국하면 3개월 이내에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답 씨는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출입국관리소에 간 일이 없었다. 여권도 남편이 갖고 있었다. (중략) 나답 씨는 외국인 등록도, 가출 신고 사실도 모른 채 지내다가 체류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출입국관리소에 갔을 때 담당 직원이 가출 신고서를 보여 주어 사태를 알게 됐다. 결국 나답 씨는 2주 동안 수원 외국인 보호소에 있다가 몽골로 강제 출국당했다." (47쪽)
이주 여성 활동가들은 귀환 여성이 발생하는 핵심 이유는 '체류 자격'이라고 지적한다. 이주 여성 체류 자격과 관련한 현행 제도는, 결혼 이주 여성이 자녀가 없이 이혼할 경우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없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2018년 폭력 피해 이주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오월의봄)를, 올해 7월에는 귀환 이주 여성을 인터뷰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오월의봄)를 펴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왜 귀환 이주 여성에 주목했고, 조사 과정은 어떠했나.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남성들의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결혼 이주를 택하는 아시아 여성들의 송출국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런데 조사를 위해 현지를 방문할 때마다 이미 결혼 이주를 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접하게 됐다. 구체적으로는 2017년 폭력 피해 여성이 혼인 취소를 겪고 체류 연장이 불가능해 한국을 떠나야 하는 사건을 지원하면서, 이들을 남을 수 없게 만드는 제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결혼 이주 여성은 귀환하더라도 본국에서 대개 사회적 낙인에 시달리는 등 사회에 재통합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귀환 이주 여성에 대해 한국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2019년 한 해 동안 현장 활동가들 9명이 필리핀·몽골·태국을 찾았다. 그곳에서 귀환 이주 여성 21명과 이주 배경 아동 2명을 만났다. 귀환 여성들을 지원하는 현지 여성 단체 및 민간 단체와 유관 기관도 방문해 활동가들도 인터뷰했다. 귀환 이주 여성은 계속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존재들이다. 이들을 '내쫓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 결혼 이주 여성이 체류 자격을 연장하기 위한 과정을 지적했는데.
한국인 남성과 혼인신고를 한 이주 여성이 한국에 처음 들어와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보통 2년 정도다. 1회에 부여받을 수 있는 체류 기간은 최대 3년이지만, 자녀 유무나 사전 정보 제공 프로그램 이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규정이 있긴 하지만, 전적으로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사무소의 재량에 달려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이 귀화를 신청하려면 첫 번째 체류 기간이 지나야 한다. 그런데 귀화 심사에도 자녀가 있으면 1년 이내, 없으면 2년 가까이 걸린다.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등의 기간을 포함하면 입국부터 귀화까지 최소 5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류를 적어도 2~3번 연장해야 한다. 물론 그 기간 배우자와 사이가 좋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주 여성들은 한국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혼자서 체류 연장을 하거나 귀화 신청을 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남편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의 체류 자격을 두고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다. 결국 결혼 이주 여성의 체류권은 오롯이 한국인 남성에게 달린 구조다.
- 결혼 이주 여성의 체류 자격 관련 제도가 왜 문제적이라고 보는가.
현행 결혼 비자(F-6)는 부부의 동거 여부, 자녀 유무 등에 따라 세분화돼 있다. 개인의 결혼 상태에 따라 체류 기간에 차등을 두는 것은 차별적·인권침해적이다. 이러한 기준에서는 자녀가 없는 여성의 경우, 이혼 시 남편의 귀책사유를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폭력 피해 이주 여성이 미등록 체류 상태가 되거나, 비자발적으로 귀환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비자 시스템을 강화하게 되면, 정해진 기준에 속하지 못하는 사례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혼인신고는 했는데 비자 발급 조건인 한국어 시험에서 탈락하거나, 배우자가 재산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결혼 이주 여성들도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다양해지는 이주민 가족 형태를 제도적으로 포용하려는 태도가 필요한데, 여전히 전통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주민 관련 제도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부적인 조건을 따지기보다 혼인 관계에 있다면 체류를 연장해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배우자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체류 자격이 안정적으로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주 여성이 결혼 생활을 하면서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법무부는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비자를 세분화했다고 하지만, 법이나 제도는 모든 사람이 조건 없이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준에 따라 처벌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주 여성 인권 운동 조금씩 '진보'
"여성운동과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은 연결돼 있어"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함께하고 있기도 하다. 허오영숙 대표는 선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평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여성운동이 더디지만 한국 사회를 바꿔 나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주 여성 인권 운동권 내에서도 체감하나.
한국의 여성운동이 일궈 놓은 성과는 당연히 이주 여성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투 운동'이나 낙태죄 폐지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여성운동의 흐름을 활용하기도 하고, 재판부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의식해 판결이 전향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주 여성 인권 운동 내에서도 굉장히 더디지만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느끼기도 한다. 한국 사회가 선주민 여성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가치를 이주 여성들에게 구현하려는 측면이 있다. 여전히 이주 여성들은 아이를 낳아야지만 체류를 연장하거나 귀화하기가 용이하다. 다문화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부서 절반 이상 '저출산다문화팀'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주 여성의 현실을 묵인하는 순간, 여성운동이 이뤄 놓은 성과가 언제든지 '백래시(backlash)'로 뒷걸음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운동과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 활동을 이어 가는 동력은 무엇인가.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현장은 늘 나에게 흥미를 유발한다. 어떤 현장이 이렇게 한 자리에서 '고인 물'이 되지 않도록 긴장감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주 여성운동을 하는 나 또한 한국인 중심적으로 사고할 때가 있다. 하루는 "중국제 말고 국산을 써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었는데, 이주 여성 동료 활동가가 핀잔을 줬다. 이제 '우리나라'라는 표현도 최대한 지양하고 국가 명칭을 쓴다. 각자 '우리나라'가 다르기 때문이다. 활동하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객체화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이주민 이슈와 여성 이슈를 동시에 다루기 때문에 운동 간 역동성을 발견하고 서로 연대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 이여인터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 나가고 싶나.
이번 이여인터의 20주년 주제가 '이주민과 함께'다. 이여인터는 이주 여성이 놓인 차별적인 상황이 있다면 그 현장을 반드시 기록하고 목소리 내는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어 나갈 것이다. 이주 여성들의 인권과 차별 이슈를 선도적으로 찾아내고, 여론화하고, 제도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계속하고 싶다. 또한 선주민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 아니라 이주 여성 당사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더 많은 이주 여성들이 현장에서 활동해 나갔으면 좋겠다.
'이주 여성들 위한 민간 대사관' 한국이주여성센터 20돌…이주 여성들에겐 '집'이 됐다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경상북도 문경시는 지난 4월 '인구 증가를 위한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추진 협조문'을 법무부 출입국 대행 기관인 행정사 합동 사무소에 보냈다. 혼인적령기를 놓친 '농촌 총각'과 베트남 유학생의 국제결혼을 통해 인구를 증가시키겠다는 취지였다. 협조문 안에는 맞선·교제 지원책과 함께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시 이주 여성의 성 상품화, 출산 도구화 등 문제가 대두됐지만, 지금도 지자체 30여 곳은 '농촌 총각 장가 보내기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결혼을 장려했다. 2005년에는 3만여 쌍이 국제결혼으로 부부가 돼 최고점을 찍기도 했다. 이후 국제결혼의 인권침해와 불법 중개 행위의 부작용 등이 알려지면서 점차 감소 추세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매년 1만 명이 넘는 이주 여성이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유입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결혼 이주 여성은 31만 5175명에 달한다(2021년 9월 기준).
한국염 목사가 설립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이여인터)는 가정 폭력,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 여성을 보호하고, 개인 지원부터 입법 운동까지 도맡았던 유일한 이주 여성 기관이었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등의 국제결혼 중개 업소 광고 문구를 고발하고, 결혼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실을 열었다. 특히 2007년에는 남편의 폭력으로 사망하는 결혼 이주 여성들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폭력 피해 여성들의 현실을 알렸다. 이 같은 노력은 이주 여성 긴급 전화 '다누리콜' 개설, 가정폭력방지법에 '외국인'을 포함하는 법 개선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허오영숙 대표는 이여인터의 2대 대표다. 2017년 대표직을 맡은 그는 이여인터와 이주 여성 인권 운동 역사를 함께해 온 14년 차 활동가이기도 하다. 20대 시절, 지역 여성 단체에서 10년 정도 활동하던 허오 대표는 NGO 연수차 방문한 필리핀에서 한국에 파견됐던 현지 노동운동가를 만나 이주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까지 '남성'으로 대표되고 있던 한국 이주민 운동 판에서, 여성운동을 해 왔던 허오 대표는 이주와 젠더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이여인터에 오게 됐다.
이여인터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이여인터는 2000년 10월 준비 모임으로 시작해 이듬해 한국 최초의 이주 여성 쉼터 '여성노동자의집'으로 문을 열었다. 2005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로 이름을 변경한 후, 이주 여성 쉼터 6개와 이주 여성 상담소 1개를 운영하고 있다.
10월 20일 오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실은 선주민·이주민 활동가들의 20주년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곳곳에 놓인 책장에는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의 기나긴 역사를 보여 주듯, 센터가 발간한 책자·단행본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20년을 걸어온 이여인터는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주 여성의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은 어떻게 흘러왔고, 어디로 가야 할까. 센터에서 만난 허오영숙 대표에게 한국 사회에서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의 의미와 과제를 들을 수 있었다. 허오 대표와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실에서 허오영숙 대표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20돌을 맞았다. 이주 여성운동을 해 오면서 체감하는 성과가 있나.
변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 같다. 일례로, 이여인터는 2016년부터 농업 분야 이주 여성 노동자 성폭력 실태를 조사하고, 이주민 주거권 개선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런데 그 후로 5년이 지난 2020년에도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가 사망했다. 한국 사회는 차별이나 폭력이 깔때기처럼 약자들에게 모이는 곳이고, 그런 것들이 이주민들한테 돌아가고 있다고 본다.
한편, 다른 부분은 잘 안 바뀌는데 한국 남성의 혈통과 관련된 문제는 빨리 바뀐다. 물론 우리가 동의하는 방식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한국인이 포함된 다문화 가정 정책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가 외국인끼리 결혼한 가족이라든지, 다양한 가족 형태나 이주민 문제 전반으로 넓혀지지는 않는다.
- 한 해에 얼마나 많은 이주 여성들이 이여인터를 이용하나.
이여인터 소속 서울 이주 여성 상담 센터에는 1년에 1만 건 정도 상담이 이뤄진다. 6개 쉼터에서는 모두 100명 내외의 인원이 입소해 있다. 수치로 통계를 내는 것은 상담소와 쉼터뿐이지만, 개별적으로 이뤄지는 직접 지원 사업도 있다. 이를테면, 코로나19 방역·지원에서 많은 외국인이 배제되지 않았나. 이주민 밀착 접촉자나 확진자에게 생필품을 지원하거나, 민간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 센터가 지원하는 대상은 주로 이주민 여성인가.
이주 여성이 첫 번째 우선순위다. 가족 단위 내에서의 여성보다는 여성 개인에 집중한다. 그렇다고 가족을 지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더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예를 들면 '다문화 가족·자녀 프로그램'이 아닌, 양육하는 여성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센터 소개 글을 보면, '이주 여성들을 위한 민간 대사관'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사관은 해외에 있는 자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이주 여성은 제도적·사회적 한계로 기본적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할 때가 있다. 이여인터는 민간에서 이주 여성들에게 대사관과 같은 곳이다. 타국에 사는 이주 여성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편들고, 기댈 만한 곳이 되겠다는 의미다. 실제 센터에서 만나는 이주 여성들에게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주 여성들이 "(이여인터는) 우리 집 같은 곳 아니야?"라는 말을 종종 하기도 한다.
- 정부나 공공 기관이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한다는 말인가.
지금은 지자체 곳곳에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나 여성가족부 소속 이주 여성 쉼터가 생겼지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여인터는 이주 여성 쉼터를 처음으로 만들고, 폭력 피해 여성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다 보니 쉼터에 온 여성들이 폭력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보게 됐다. 쉼터에 있는 동안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지만, 생활비를 지원하거나 국내 체류 기간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주 여성들에게는 선주민 여성들이 가진 네트워크나, 자녀 돌봄 등 어려움을 같이할 친정도 없다. 결국 자립할 자원이 없는 이주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쉼터에서 퇴소해 자립을 원하는 이주 여성들을 대상으로 가전제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2019년부터는 여성가족부에서 이주 여성 쉼터 퇴소 여성들에게 자립 지원금(임대 보증금)을 지원했다. 한국어 교실이나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 운영도 마찬가지다. 이주 여성 단체들이 먼저 시작해 성과가 인정되면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정부도 나서서 관련 사업을 시행하는 식이다.
허오영숙 대표는 이주 여성들을 향한 차별이 국가 간 경제 격차에서 오는 왜곡된 우월 의식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이주 여성을 향한 폭력은 왜 발생한다고 보는가.
이주 여성은 기본적으로 인종, 출신 지역, 성별 등으로 인한 '복합 차별' 상태에 놓여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더해 국가 간 경제적 격차에서 발생하는 편견이 작동하는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이주 목적국'이라는 위치를 갖는다고 해서, 마치 개인이 우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다. 결혼 이주 여성의 경우, 이러한 '한국 우월주의' 속에서 중개업을 통한 속성 결혼과 남성이 비용을 지불하는 구조가 맞물려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결혼 이주 여성 개인 입장에서 보면 현지에서도 가난하고 한국에서도 가난한 경우가 많다.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남성이 결혼하는 것을 두고, 단지 나라가 부자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주 여성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식의 인식은, 서구는 선망하면서 아시아 저개발 국가는 차별하는 한국의 '식민지성'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 한편으로는 이주 여성을 피해자로만 보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물론이다. 한국 사회에 잘 안착한 결혼 이주 여성도 있고, 모든 이주 여성이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피해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소수자는 일반화되기 쉽다. 한국 사회에서는 누군가 폭력을 당했다고 해도, 모든 한국 여성들이 다 맞고 산다고 일반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주 여성의 폭력 경험에 있어서는, 모든 이주 여성이 불쌍하다는 시각으로 바로 연결된다. 사례를 개별적으로 봐야 하는데 집단화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가깝다고 본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탈피하기 위해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주 여성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센터의 한 축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가 주목하지 않는 '귀환 이주 여성'
"한국인 남성 중심 체류 정책 문제적"
이여인터는 최근 귀환 결혼 이주 여성을 인터뷰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오월의봄)를 출간했다.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왔지만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등 자발적·비자발적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한국 사회는 이들에 대한 별도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귀환 여성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귀국하는지, 귀국 뒤에는 어떻게 본국 사회에 재통합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결혼 이주 여성이 한국 땅을 떠나는 순간,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잊히는 것이다.
"나답 씨가 미등록자 신분으로 단속에 걸린 것은 그녀가 외국인 등록이 돼 있지 않은 데다가 가출 신고까지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해서 한국에 입국하면 3개월 이내에 외국인 등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답 씨는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출입국관리소에 간 일이 없었다. 여권도 남편이 갖고 있었다. (중략) 나답 씨는 외국인 등록도, 가출 신고 사실도 모른 채 지내다가 체류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출입국관리소에 갔을 때 담당 직원이 가출 신고서를 보여 주어 사태를 알게 됐다. 결국 나답 씨는 2주 동안 수원 외국인 보호소에 있다가 몽골로 강제 출국당했다." (47쪽)
이주 여성 활동가들은 귀환 여성이 발생하는 핵심 이유는 '체류 자격'이라고 지적한다. 이주 여성 체류 자격과 관련한 현행 제도는, 결혼 이주 여성이 자녀가 없이 이혼할 경우 자신에게 귀책사유가 없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2018년 폭력 피해 이주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오월의봄)를, 올해 7월에는 귀환 이주 여성을 인터뷰한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오월의봄)를 펴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왜 귀환 이주 여성에 주목했고, 조사 과정은 어떠했나.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 남성들의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결혼 이주를 택하는 아시아 여성들의 송출국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런데 조사를 위해 현지를 방문할 때마다 이미 결혼 이주를 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접하게 됐다. 구체적으로는 2017년 폭력 피해 여성이 혼인 취소를 겪고 체류 연장이 불가능해 한국을 떠나야 하는 사건을 지원하면서, 이들을 남을 수 없게 만드는 제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다. 결혼 이주 여성은 귀환하더라도 본국에서 대개 사회적 낙인에 시달리는 등 사회에 재통합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귀환 이주 여성에 대해 한국 사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2019년 한 해 동안 현장 활동가들 9명이 필리핀·몽골·태국을 찾았다. 그곳에서 귀환 이주 여성 21명과 이주 배경 아동 2명을 만났다. 귀환 여성들을 지원하는 현지 여성 단체 및 민간 단체와 유관 기관도 방문해 활동가들도 인터뷰했다. 귀환 이주 여성은 계속 있었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존재들이다. 이들을 '내쫓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 결혼 이주 여성이 체류 자격을 연장하기 위한 과정을 지적했는데.
한국인 남성과 혼인신고를 한 이주 여성이 한국에 처음 들어와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보통 2년 정도다. 1회에 부여받을 수 있는 체류 기간은 최대 3년이지만, 자녀 유무나 사전 정보 제공 프로그램 이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규정이 있긴 하지만, 전적으로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사무소의 재량에 달려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이 귀화를 신청하려면 첫 번째 체류 기간이 지나야 한다. 그런데 귀화 심사에도 자녀가 있으면 1년 이내, 없으면 2년 가까이 걸린다.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는 등의 기간을 포함하면 입국부터 귀화까지 최소 5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류를 적어도 2~3번 연장해야 한다. 물론 그 기간 배우자와 사이가 좋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주 여성들은 한국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혼자서 체류 연장을 하거나 귀화 신청을 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남편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의 체류 자격을 두고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다. 결국 결혼 이주 여성의 체류권은 오롯이 한국인 남성에게 달린 구조다.
- 결혼 이주 여성의 체류 자격 관련 제도가 왜 문제적이라고 보는가.
현행 결혼 비자(F-6)는 부부의 동거 여부, 자녀 유무 등에 따라 세분화돼 있다. 개인의 결혼 상태에 따라 체류 기간에 차등을 두는 것은 차별적·인권침해적이다. 이러한 기준에서는 자녀가 없는 여성의 경우, 이혼 시 남편의 귀책사유를 법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면 체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폭력 피해 이주 여성이 미등록 체류 상태가 되거나, 비자발적으로 귀환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비자 시스템을 강화하게 되면, 정해진 기준에 속하지 못하는 사례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혼인신고는 했는데 비자 발급 조건인 한국어 시험에서 탈락하거나, 배우자가 재산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거나,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수 없는 결혼 이주 여성들도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다양해지는 이주민 가족 형태를 제도적으로 포용하려는 태도가 필요한데, 여전히 전통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주민 관련 제도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부적인 조건을 따지기보다 혼인 관계에 있다면 체류를 연장해 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배우자의 동의 여부에 상관없이 체류 자격이 안정적으로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주 여성이 결혼 생활을 하면서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법무부는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비자를 세분화했다고 하지만, 법이나 제도는 모든 사람이 조건 없이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준에 따라 처벌하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주 여성 인권 운동 조금씩 '진보'
"여성운동과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은 연결돼 있어"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함께하고 있기도 하다. 허오영숙 대표는 선주민과 이주민이 함께 평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 여성운동이 더디지만 한국 사회를 바꿔 나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분위기를 이주 여성 인권 운동권 내에서도 체감하나.
한국의 여성운동이 일궈 놓은 성과는 당연히 이주 여성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투 운동'이나 낙태죄 폐지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여성운동의 흐름을 활용하기도 하고, 재판부도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의식해 판결이 전향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주 여성 인권 운동 내에서도 굉장히 더디지만 무언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느끼기도 한다. 한국 사회가 선주민 여성들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가치를 이주 여성들에게 구현하려는 측면이 있다. 여전히 이주 여성들은 아이를 낳아야지만 체류를 연장하거나 귀화하기가 용이하다. 다문화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부서 절반 이상 '저출산다문화팀'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주 여성의 현실을 묵인하는 순간, 여성운동이 이뤄 놓은 성과가 언제든지 '백래시(backlash)'로 뒷걸음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운동과 이주 여성 인권 운동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 활동을 이어 가는 동력은 무엇인가.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현장은 늘 나에게 흥미를 유발한다. 어떤 현장이 이렇게 한 자리에서 '고인 물'이 되지 않도록 긴장감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주 여성운동을 하는 나 또한 한국인 중심적으로 사고할 때가 있다. 하루는 "중국제 말고 국산을 써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뱉었는데, 이주 여성 동료 활동가가 핀잔을 줬다. 이제 '우리나라'라는 표현도 최대한 지양하고 국가 명칭을 쓴다. 각자 '우리나라'가 다르기 때문이다. 활동하면서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객체화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이주민 이슈와 여성 이슈를 동시에 다루기 때문에 운동 간 역동성을 발견하고 서로 연대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 이여인터는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 나가고 싶나.
이번 이여인터의 20주년 주제가 '이주민과 함께'다. 이여인터는 이주 여성이 놓인 차별적인 상황이 있다면 그 현장을 반드시 기록하고 목소리 내는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어 나갈 것이다. 이주 여성들의 인권과 차별 이슈를 선도적으로 찾아내고, 여론화하고, 제도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계속하고 싶다. 또한 선주민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는 운동이 아니라 이주 여성 당사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더 많은 이주 여성들이 현장에서 활동해 나갔으면 좋겠다.